2002. 9. 『오늘의 동양사상』 7, 예문동양사상연구원

(인문정책 심포지움「한국인문정책의 방향과 과제」, 2002. 6. 14. 인문사회연구회)


디지털 정보 시대의 인문학

- 인문학의 e-R&D1) 환경 구축을 위한 제언 -


김  현


1. 인문학의 새로운 무대


  겸애설(兼愛說)로 잘 알려진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묵적(墨翟, 墨子)의 언행을 담은 『묵자(墨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수반이 초나라를 위하여 운제(雲梯)라는 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것이 완성되자 초나라는 송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묵자는 이 말을 듣자 제나라를 출발하여 열흘 낮 열흘 밤을 달려 초나라의 도읍 영(郢)에 이르러 공수반을 만났다. ..... 묵자는 허리띠를 끌러 성을 만들고 나뭇조각으로 기계를 만들었다. 공수반은 아홉 번이나  방법을 바꾸면서 기계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묵자는 아홉 번 모두 이를 잘 막아냈다. 공수반의 공격 방법은 다하였으나 묵자의 방위법에는 남음이 있었다. ..... 초나라 왕이 말하였다. “좋다. 송나라를 공격하지 않겠다.”  (『墨子』 「公輸篇」)


  2천4백여 년 전 묵자와 공수반이 행한 전쟁 모의실험은 오늘날 컴퓨터로 해 보는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과 유사하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것이 단지 유희나 연습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실제의 전쟁을 대신하였다는 것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시스템을 이용하여 하는 일들은 현실 세계의 일에 편의성과 신속성을 더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오늘날의 디지털 산업은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의 특정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발전하고 있다.

  “도서관 자동화”(Library Automation)와 “전자 도서관”(Digital Library)은 “컴퓨터를 이용한 정보의 디지털화”라는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추구하는 목표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도서관 자동화”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갖는 현실세계의 도서관의 운영 업무를 보다 효율화하기 위해 전산 시스템을 도입․적용하는 것이다. 반면 “전자 도서관” 현실 세계에서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는 전통적 도서관을 없애는 대신 그 기능이 컴퓨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가상의 전자 공간에서 행해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1994년부터 미국의 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NSF), 국방부 첨단프로젝트연구국(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ARPA), 국가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이 공동으로 지원하는  디지털 라이브러리 연구 프로젝트(Digital Libraries Initiative)의 표어는 “The Network is the Library"이다.

  가상의 전자 공간 안에서 전자 장치를 이용하여 이루어지는 거래 행위를 “전자상거래(Electronic Commerce)”라고 한다. 그 공간 안에서 소비자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가상의 백화점을 방문하여 마우스 버튼을 누르는 행위로 자신이 원하는 물품을 구매한다. 오늘날에는 그것이 현실적인 구매 행위로 이어져 물리적인 상품이 물리적인 유통 경로를 거쳐 구매자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전자적 상품 유통이 소비의 최종 단계까지 가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가상 백화점에서 구입한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고 가상의 놀이 공간에 가서 여가를 즐기는 환상 여행은 유통과 소비의 모든 과정이 가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미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그 속의 자기 분신(아바타)에게 돋보이는 의상을 입히고 그 세계 속에서 생활의 편의성을 더하는 가상 아이템의 구매를 위해 돈을 지불하는 일이 일반화되고 있다.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의 일을 대체하는 것은 과학기술 연구 개발 분야에서도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디지털 정보가 연구 개발을 지원하는 일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연구 성과에 관한 문헌 정보의 온라인 서비스, 이른 바 레퍼런스의 제공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이제 과학기술 연구를 위한 실험실을 가상의 공간 안에서 운영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실험 장비를 대신하고 온도, 기압의 조절과 같은 환경의 변화, 시약의 투입, 원료의 배분 비율, 운전 속도의 조정이 모두 디지털화 된 데이터 값의 변화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른바 전자적 연구 개발(Electronic Research & Development, e-R&D)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문 방법은 컴퓨터 시스템을 연구개발의 도구로 삼는 것이라기보다 디지털 세계 속에 들어가 연구 개발 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상세계가 현실세계의 일을 완전히 대체하는 상황은 “매트릭스”, “13층”, “바닐라 스카이” 같은 SF 영화에서 극단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물론 픽션이다. 그러한 상황이 도래할 개연성에 대해 아직은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디지털 정보화를 통해 확대되는 가상 세계가 현실 세계와 점점 더 밀접하게 연계되어 미래의 우리의 삶은 두 세계를 수시로 넘나드는 형태가 될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디지털 세계의 사이버 공간이 현실 세계와 무관한 환상의 공간이 아니고 우리의 생활의 적지 않은 부분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게 될 또 하나의 실제적인(Virtual) 삶의 공간이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디지털 세계의 사이버 공간이 인문과학이 학문활동을 전개하는 또 하나의 무대가 되어야 함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2. 사이버 세계의 인문학적 수요(需要)


  현재까지도 인문학도들은 디지털 정보 환경의 변화에 대해 그렇게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하여 논문을 집필하고 e-mail을 통해 원고를 전송하며 연구 성과에 관한 문헌 자료를 디지털 콘텐트로 구축하여 유관 분야의 연구자들이 참고 자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 등은 적어도 타학문 분야의 추세에 비추어 그다지 뒤지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인문과학의 연구 및 교육 활동에 있어서 디지털 정보는 어디까지나 편의성을 더하는 도구의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 디지털 세계가 인문과학이 학문 활동을 하고 연구 성과를 확산하는 현장이 되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인문학 연구자들은 사이버 세계의 일들이 자신의 전통적 학문과 무관한  듯이 여기고 있는지 몰라도, 사이버 정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다종 다양한 일들은  근본적으로 인문 지식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세인들에게 충격을 주는 사회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신문이나 TV와 같은 전통적 커뮤니케이션 매체보다 더 빠르게 격렬한 논의가 오가는 의사소통의 현장이 인터넷 상에 개설된 대중 사이트들의 게시판이라고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매스 미디어를 통한 여론 환기의 일회적인 떠들썩함이 지나간 후에도 특정 주제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같는 동호회의 사이트에는 그 일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사이버 공간 상의 토론이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의사 표출의 단계를 지나 문제의 근본 원인을 살피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을 때 토론자들이 궁극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은 인간과 사회의 근본 문제를 성찰하는 철학적인 지식일 수밖에 없다. 사이버 세계의 네티즌들은 그러한 지식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청소년뿐 아니라 삼십대의 중반의 직장인들에게까지 인기를 얻어 수십만의 가입자를 확보한  온라인 게임의 소재가 단순히 싸우고 빼앗는 행위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수천 년의 인류 역사 속에서 살필 수 있는 다양한 사실과 사건들을 소재로 삼음으로써 방문객들의 지속적인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모험의 줄거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게임 메이커들이 변덕스러운 고객을 지속적으로 붙들기 위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이야기의 소재는 어떠한 방법으로 확보될 수 있을까?

  현재까지의 인문학 분야의 정보화 사업이 추구해 온 목표는 인문학자들의 현재까지 몸담아온 전통적인 학문 활동의 효율성의 제고하기 위해 전산화된 참고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등을 전산화하여 신속한 자료 검색을 가능케 한 것이 그 일례이다. 이러한 정보화 사업의 수혜자는 인문학 연구자 자신들에 국한된다.  미래의 목표는 인문학의 연구자들이 정리하고 계발한 지식이 시간적․공간적 단절 없이 사이버 세계의 몸담고 있는 지식 수요자들에게 전달되고 그들 지식 수요자의 요구가 인문학 연구의 새로운 주제를 발굴하는 데 일조하도록 하는 것이다.


3. 인문학의 e-R&D 환경 구축을 위한 과제


  인문 지식이 사이버 세계의 지식 수요에 부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인문학 연구자들이 전공 분야의 연구 활동을 전자적인 체계 안에서 수행함으로써 그 결과물이 곧바로 2차적인 지식 상품의 생산자나 지식 유통의 최종 수요자에 의해 공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인문 지식의 연구․교육 체계와 사이버 세계의 지식 유통 체계 사이의 상호운영성(Interoperability)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상호운영성이란  각기 다른 기계 장치가 동일한 조작 방식에 의해 운전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 말은 원래 기계 장치의 운영에 쓰이는 용어로서 지식 자원에 대해서는 적합한 개념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전산화된 정보 자원은 정보 시스템 안에서 전자적인 디지털 신호로서 소통되므로, 이러한 전자적 소통을 위주로 말한다면 상호운영성이란 용어의 적용이 불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세계 각처의 개인용 컴퓨터들이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개개의 컴퓨터에 부착된 통신 장비와 중계 역할을 담당하는 서버 장비 사이의 상호운영성이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바 언어로 개발한 애플릿 프로그램이 사용자의 단말기 기종에 관계없이 작동할 수 있는 것도 이종(異種)의 운영 체제와 응용 프로그램 사이의 상호운영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디지털 세계에서 이 상호운영성의 문제가 중요시되는 것은 이 점이 확보되지 않고서는 정보 시스템의 어떠한 기능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 환경에서 인문 지식 자원의 상호운영성(Interoperability)을 구현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인문 지식의 전자적 생산․소통을 위한 표준화된 지식 기술(記述) 형식에 대한 연구이다. SGML(Standard Generalized Mark-Up Language)이나 XML(Extensible Mark-Up Language)과 같은 전자 문서 형식을 적용하여 그 안에 기술된 내용의 논리적 구성이 기계적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술적(技術的) 상업적(商業的) 전자 문서의 생산에서는 이미 널리 적용되고 있는 방법이지만, 학술 분야, 특히 인문학 분야에서는 그에 관련된 기술의 도입과 함께 표준화의 노력이 시급히 필요한 상황이다.

  인문 분야에서 지식의 전자적 상호운영성을 확보해 주는 지식 기술 형식이 만들어져 인문계 연구자들의 교육․연구 활동의 산출물이 생산 초기부터 전자정보로 생성되고 그것이 정보통신 네트워크를 통해 유관 분야 연구자들에게 즉각적으로 공유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인문학의 e-R&D 환경을 구축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을 이루게 되면 인문학의 연구는 그 결과물뿐 아니라 연구 공간 자체가 사이버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 다음 과제는 인문학 연구의 기초 자원이 되는 과거의 지식 자원 (Legacy Data) 역시 e-R&D 환경에서 전자적인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디지털 라이브러리의 구축이다. 이 때 우리가 과거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점은 e-R&D를 지원하는 디지털 라이브러리의 콘텐트 구축은 단순한 레퍼런스 제공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가상 실험실(Virtual Laboratory)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수년 전 『조선왕조실록』의 텍스트 전문을 디지털 자원한 정보시스템을 개발하였으며, 이는 CD-ROM과 인터넷 데이터 서비스의 형태로 인문계 연구자들 사이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디지털 자원의 활용 형태는 단어 검색 또는 분류 주제 검색을 통한 참고 자료의 제공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러한 형태의 활용 방법은 전산화된 이 자원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활용 방법의 1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생각된다. 적지 않은 인력과 재원을 투여하여 가공된 이 디지털 데이터는 역사학이나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 목적에 맞는 새로운 응용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적용하여 새로운 연구 데이터를 자동적으로 산출할 수 있도록 하는 개방된 정보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외교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실록』의 텍스트로부터 외국인명으로 추정되는 어휘들을 탐색하고 그 인물이 등장한 사건의 기록들을 어휘 분석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기계적으로 요약 추출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자연 현상에 대한 무수한 기록들과 그와 관련하여 일어난 종교 행사, 왕의 교지, 신하의 상소 등에 담긴 내용 역시 자동적으로 추출하고 유형화하여 그 시대의 철학적․종교적 자연관을 엿보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이는 마치 생물정보학자들이 인간 유전체의 염기 서열에 관한 방대한 데이터를 단순히 참고 자료로 쓰기 위해 검색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체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어내기 위한 실험 데이터로 쓰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자원이 참고 자료가 아니라 실험 데이터로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데이터의 기술 형식과 응용 프로그램 사이의 상호운영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정보화 사업을 무턱대고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 정보가 우리의 후학들에 의해 e-R&D의 자원으로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기술 체계 마련의 노력이 더 급선무인 것이다.


4. 학제적(學際的) 연구 인력의 양성


  인문학의 e-R&D 환경 구축에 연구 개발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는 인문 지식의 정보화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웹 페이지 제작처럼 이미 표준화된 기술과 도구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용이하게 처리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 지식은 수천 년 간 아날로그의 세계에서 진화해 온 각국의 고유한 언어를 매개로 인간의 사유를 기술하는 것이다.  인문학자들은, 자신의 학문은 자연어를 사용하여 기술되기 때문에 학제적인 의사 소통이 용이한 반면, 수식과 기호를 위주로 기술되는 자연과학의 지식은 그러한 부호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타 분야의 사람들에게는 암호와도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계적 상호운영성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컴퓨터 시스템의 입장에서 보면 이른바 자연어로 기술된 인문지식은 기계적 상호운영이 가능한 형태로 체계화하는 일이 더욱 어렵고 복잡하다. 더구나 인문학자들이 자연어라고 하는 학문 기술 언어도 실은 일상적인 자연어와는 상당히 다른 전문 언어이므로 일반적인 언어 처리 기술을 통해 전문적인 인문 지식을 정보화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인 것이다.

  컴퓨터 시스템의 전자적 체계 안에서 인문 지식의 생산과 유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전자적 기술 형식의 개발은 전문적인 인문지식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때 제기되는 문제는 누가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이 아직까지 정보 기술의 문외한인 것처럼, 정보 기술의 전문가들에게는 인문학적 지식이 난해한 암호로 엮여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문 지식 자원의 디지털 콘텐트화 사업에서 인문 분야 사람들의 역할은 아날로그 자원의 수집과 정리에 머물고 그것을 정보 시스템 속에서 운영되는 디지털 자원으로 구축하는 일은 상업적 기술 업체의 손에 맡기고 있다. 연구 따로 정보화 따로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미래의 사이버 세계에서 요청되는 인문 지식을 인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신속하고 다양하게 제공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미래의 인문학이 e-R&D의 방법으로 사이버 세계에서 그 성과와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문학 연구자들이 스스로 인문학의 연구 자원과 연구 성과에 대해 디지털 정보 자원으로서의 상호운영성을 부여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정보 기술을 습득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자연과학분야에서도 e-R&D는 자연과학자에게 수준 높은 정보기술자의 역량을 요구한다. 실제로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나 화학정보학(Cheminformatics) 등 생물학, 화학 등의 전통적인 분과 과학과 정보학의 결합을 추구하는 학제적 연구의 연구자들은 종래의 전통적인 분과 과학의 연구자보다 정보기술자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5. 정책적 지원, 전담기관 육성의 필요성


  인문 지식의 e-R&D 환경 구축을 위해서 연구 개발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고, 또 그를 위해서는 인문학과 정보 기술을 아우르는 인력의 양성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은 현재 상태의 우리나라 인문 분야 연구․교육 시스템에서 담당하기에는 벅찬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새로운 과제의 추진을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정책적인 지원과 그 지원에 의한 연구 개발 및 인력 양성 사업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갈 전담 기관의 육성이 필요하다. 전담 기관은 우리나라 인문과학의 e-R&D 환경 구축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인지를 정하고, 그 목표의 실현을 위한 인적․기술적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법적․제도적 장치 또는 유관 기관간의 협력 체계가 필요한지에 대해 연구하여 그것이 정부 시책의 일환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주무 부처의 행정 업무를 지원해야 한다. 인문 정보 분야의 연구 개발 과제를 도출하고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하며, 이들 과제로부터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성과가 나올 수 있도록 체계적인 R&D 관리 업무를 수행하는 것도 이 기관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이 될 것이다.

  세계적으로 정보 유통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고 하는 인터넷의 개발이 1960년대에 미국 국방부의 첨단연구프로젝트국(ARPA)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때 ARPA가 했던 역할은 자체적으로 새로운 통신 기술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술 개발의 국가적인 목표를 세우고 연구 과제를 도출한 후 그 과제들을 대학과 기업의 연구자들에게 배분하여 연구 개발 업무가 수행되도록 하는 연구 관리 (Project Management) 업무였다.

  올해 우리나라의 국가 지원 연구 개발 사업의 재원은 대략 GNP의 5%, 연간 5조 원에 달하는 규모이다. 모든 연구비는 중앙 부처에서 주관하는 사업 단위(Program Level)의 기획과 부처별 과제 관리 기관이나 공공 연구기관에 위임된 과제 단위(Project Level)의 관리, 평가 체계에 의해 집행된다. 사업 및 과제 수준에서의 철저한 기획과 그것을 토대로 한 예산 확보의 노력이 선행되지 않고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 개발 사업을 시행할 수 없다.  이러한 연구 개발 사업 체계에서는 실제의 연구 업무 수행 단계보다 연구 기획의 단계에서 우수한 전문 인력의 역할이 더 많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 설정이 합리적이고 명확해야만 그 계획에 따라 파생되는 세부 연구 과제들이 모호한 방향으로 표류하지 않고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인문 지식의 디지털 정보화에 관심을 갖는 개인 연구자나 단체는 더러 있어도 이 분야의 일에 관한 종합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수행 전략을 수립하는 역할은 누구에게도 부여되어 있지 않다.

  인문 지식의 정보화, 나아가 인문학 연구 활동과 인문지식의 보급을 전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인문학의 e-R&D  환경 구축을 위한 연구 사업과 인력 양성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역할은 누가 담당할 수 있을 것인가?  기존의 정부 출연 기관 가운데 인문 정보 분야의 우수한 연구 기획 인력을 초치하여 이 분야의 사업을 추진할 법적 근거와 수행 의지를 가진 기관이 있다면 이 기관을 중심으로 인문학의 e-R&D 기반 구축 사업이 시작되도록 인문계 연구자와 관계 부처 공무원들의 콘센서스를 모으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일 기존의 기관 가운데 그만한 의지와 전문적인 역량을 가진 곳이 없다면, 중복성과 실효성에 대한 무수한 논란에 대응할 각오를 단단히 한 가운데 “디지털인문학연구원”이나 “인문정보연구원”과 같은 이름의 새로운 전문 기관의 설립을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6. 인문학 연구자들을 위한 제언


  오늘날의 인문계 연구자들이 종사하는 인문학 연구의 자원과 연구성과들이 디지털 신호로 구축되는 사이버 세계에서 무용한 것이 아니며, 그 요청의 강도는 현실세계에서보다도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사회 구조가 개편될 때마다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원리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망하는 문화적 성찰과 새로운 가치관이 확립이 요구되었으며 그러한 요청에 부응하는 역할을 인문 분야의 제학문이 담당하여 왔다. 디지털 시대는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맞이하는 새 국면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것은 현실세계에 축적된 것들과 무관하게 동떨어진 곳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세계가 아니다.  현재로서는 현실 세계의 일부분, 그리고 미래에는 좀 더 많은 부분이 옮겨갈 인류 문명의 새로운 거주 공간에서 인문학은 과거의 현실 세계에서 담당하였던 역할을 견실하게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학문의 내용과 연구 방법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모습으로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러한 유의 변화는 과거에도 끊임없이 있어 온 것이며 오늘날에만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 정보 시대를 맞아 인문학의 내용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는 인문학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필자가 이 논의를 통해 제기하고자 했던 것은 방법상의 문제로서 인문학 연구 활동 및 인문 지식의 확산이 디지털 정보 시대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도록 인문학의 e-R&D 환경 기반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디지털 인문 지식 자원의 상호운영성 확보를 위한 연구, e-R&D를 지원하기 위한 인문정보 디지털 라이브러리의 구축, 인문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위해 정보기술을 자유롭게 응용할 수 있는 인문정보학자의 양성 등의 과제는 현 체제의 인문 분야 연구․교육 시스템이 당장에 자임하고 나서기에는 벅찬 과제이다. 종이 위에 적힌 문자에 의존하여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해 온 기성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전자적 연구 개발”(e-R&D)은 쉽게 적응하기 어려운 낯선 개념일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인문학적 연구와 그 성과 확산의 무대를 사이버 공간 상에 구현하는 일의 당위성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의 다음 세대에서는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를 하는 것까지 주저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인문과학, 그 중에서도 필자가 몸담고 있는 동양 사상 분야에서는 아직까지 소수이기는 하지만 연구 대상 문헌을 전자적인 데이터로 전환하는 일에 관심을 둔 개인이나 기관들이 동양학 문헌정보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동양학의 e-R&D 환경 구현을 위한 우리들의 준비는 그러한 선구적인 작업 성과를 무관심하게 방치하지 않고 그것이 자신의 교육․연구 활동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미흡한 성과라 할지라도 적극적인 활용이 뒤따를 경우 그 분야의 정보 시스템은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발전을 거듭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우리들은 그와 같은 정보 시스템의 활용 속에서 미래의 전자적 연구 개발 활동에 대해 보다 분명한 비젼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정보 사회에서 인문학의 역할을 강화할 수 있는 인문학적 e-R&D의 전망에 대해 기성 인문학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정부로 하여금 이 분야에 대한 정책적 투자를 확대할 수 있게 하는 선행 요건일 뿐 아니라, 새로 인문학에 입문한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인문학과 정보학을 아우르는 학제적 연구에 관심을 갖게 하는 동인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김 현(金 炫)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자통신연구원(ETRI) 뉴미디어정보시스템연구실장, 서울시스템(주) 학국학데이터베이스연구소장, 하버드 대학 방문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정보시스템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겸임하고 있다.  『국역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CD-ROM』 개발 사업을 주관하였으며, 저서로는 「임성주의 생의철학」 등이 있다.




1) e-R&D: electronic Research & Development(전자적 연구 개발)의 약어. 학문 활동이 컴퓨터와 정보 통신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전자적 연구 환경 안에서 수행되는 것을 의미한다.